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(문단 편집) == 한국과의 관계 == 타고르는 한국을 소재로 한 시, 《동방의 등불》을 남겼다. 《동방의 등불》은 1929년 타고르가 일본에 들렀을 때, [[동아일보]] 기자가 한국 방문을 요청하자 이에 응하지 못함을 미안하게 여겨 그 대신 동아일보 기자에게 전해준 짧은 시이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. >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>빛나던 등촉의 하나인 조선 >그 등불 한번 다시 켜지는 날에 >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>---- > 1929년 4월 2일 [[동아일보]] [[https://newslibrary.naver.com/viewer/index.nhn?articleId=1929040200209202001&editNo=1&printCount=1&publishDate=1929-04-02&officeId=00020&pageNo=2&printNo=3094&publishType=00020|기사]] 다음날 동아일보는 타고르가 써줬던 영어 원문도 실었다. >In the golden age of Asia >Korea was one of its lamp-bearers, >and that lamp is waiting >to be lighted once again >for the illumination >in the East >---- > 1929년 4월 3일 [[동아일보]] [[https://newslibrary.naver.com/viewer/index.nhn?articleId=1929040300209202007&editNo=1&printCount=1&publishDate=1929-04-03&officeId=00020&pageNo=2&printNo=3095&publishType=00020|기사]] 이보다 더 긴 버전으로 돌아다니는 시는 누군가가 타고르의 다른 작품인 '기탄잘리 35'의 글귀를 짜깁기해 이어붙이고 마지막엔 출처도 알 수 없는 '나의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'라는 문구가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.[[http://www.kyosu.net/news/articleView.html?idxno=26437|#]] 타고르의 또 다른 작품인《패자(敗者)의 노래》는 [[최남선]]의 요청에 따라 쓴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이전에 타고르 자신이 [[번역]]해 [[http://dongne.donga.com/2009/12/21/d-story-32-%ED%83%80%EA%B3%A0%EB%A5%B4%EC%9D%98-%EC%8B%9C%EC%99%80-%EA%B4%80%EB%A0%A8%EB%90%9C-%EC%98%A4%ED%95%B4%EB%93%A4/|미국에서 발간한 시집인 '채과집(Fruit-Gathering)'에 실린 것을 그냥 보낸 것]]이다. 최남선이 이를 '''타고르가 한국을 위해 쓴 창작물로 오해'''한 것. 거기다 문구도 원문과 비교하면 [[오역]]이 들어가 있는 상황이니. 위의 시들로 인해 한국을 우대한 인물로 국내에 알려져 있지만, 실은 일본의 문화에 매료된 [[자포네스크]]적 기질의 인물로 '일본은 시심을 자아내는 나라'라든지 '일본은 아시아에 희망을 가져다주었다. 우리는 이 해 뜨는 나라에 감사한다'라든지 하는 말을 하며 일본을 5차례 방문하고 [[러일전쟁]]에 일본을 숭상하는 시를 써 기고하기도 했으며 군국주의를 밀어주던 일본 우익의 거물 [[https://ko.wikipedia.org/wiki/%EB%8F%84%EC%95%BC%EB%A7%88_%EB%AF%B8%EC%93%B0%EB%A3%A8?wprov=sfla1|도야마 미쓰루(頭山滿)]]와도 친분이 있는 인물이었다.[* 아마 일본의 힘이 커졌으니 일본이 (인도를 포함한) 대다수 국가들이 서양의 식민지로 전락해있는 아시아의 주권을 위해 서양 열강과 맞서 싸울 것이라고 생각한 듯하다.([[아시아주의]]) [[수카르노]]나 [[찬드라 보스]]처럼 아시아의 민족주의자들 중에서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. 한국에서도 일본이 한일병탄을 하며 [[대한제국]]을 식민지로 삼기 이전까지는 일본의 제국주의 야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그런 생각을 한 사람이 제법 많았었다. 한일병탄 이전에 쓰여진 [[안중근]] 의사의 동양평화론에도 이런 시각이 어느 정도 담겨 있다. [[이승만]]도 1903, 1904년 정도까지만 해도 일본을 그렇게 싫어하진 않았으며 일본에 우호적인 모습도 일부 있었으나, 일본이 스스로 서양 열강과 다름없이 같은 아시아 국가인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모습을 드러내자 강경한 반일로 돌아선다.] 다만 일본에서의 강연에서 "이 나라(일본)는 물질적으로는 진보했지만 정신적으로는 퇴보하고 있다"라고 하거나, "일본이 인도에도 야심을 품고 있는 듯하다.[* 일본이 인도를 공격하려 한다는 이야기는 그 기원이 꽤 오래되었다. 이미 1592년 [[임진왜란]]을 일으켰던 [[도요토미 히데요시]]는 조선을 정복한 다음에 중국 명나라도 점령하고 그 다음으로 인도에까지 쳐들어가겠다고 호언장담했다. 그리고 1882년 12월 일본의 지식인인 [[후쿠자와 유키치]]는 “언젠가 한 번은 인도, 중국의 현지인 등을 다스리는 것에서 영국인을 본받을 뿐만 아니라..."는 글을 남겼는데[[http://cafe.daum.net/historywar/Nwp/2490|출처]], 이는 중국과 인도에 대한 야심을 드러낸 대목이다.] 굶주린 그들은 지금 조선을 잠식하고 중국을 물어뜯고 있다"라고 [[일본 제국주의]]를 비판하기도 했다. 오히려 일본은 정신 면에 많이 낙후되었다고 비판하여 극우 일본인들에게 크게 미움을 사기도 했다. 그가 중시한 건 바로 마음과 정신이었다. 어쨌든 타고르에게 한국은 중국이나 일본보다 한참 관심없는 국가였다. 하지만 그 시절 고립무원의 처지에 있던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는 이 정도도 감지덕지한 수준이었다. 지금으로 말하자면 [[방탄소년단]]이 서아프리카나 남아시아의 잘 알지도 못하는 약소국에서 팬이라고 계속 연락해오니 그 나라의 팬들을 위해 짧은 영상 하나 만들어 준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. 본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을지 몰라도 그 나라의 팬들에게는 매우 대단하게 생각되는 일이었을 것이니,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감안하고 왜 그 시절에 타고르 열풍이 일었는지를 해석해야 할 것이다. 그 외에 [[최인훈]]의 소설 [[광장(소설)|광장]]에서 주인공 이명준이 그토록 찾던 중립국으로 가는 배 이름인 '타고르 호'로 언급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